[최학림의 문화세상] 형식이 곧 내용이다
조선 후기에 예송논쟁이 있었다. 현종과 숙종 때였다. 임금과 대비가 몇년상을 치르고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의 논쟁이었다. 당파가 사색으로 갈려 갑론을박이 쿵덕거렸다. 추념이 중요하지 몇년상을 치르는 것 따위가 왜 중요한가, 그것은 형식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이 적통인가, 적통이 아닌가 하는 문제와 소급 연관돼 있었다. 몇년상이냐,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느냐의 형식 논쟁은 곧 내용의 논쟁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현종 숙종 때 이미 완숙한 단계였다. 무엇이 완숙해진 단계에서는 형식이 곧 내용이 되고, 양이 곧 질이 되는 법(양질전환의 법칙)이다.
지금 한창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디자인 담론' 속에서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선언의 또 다른 버전을 읽을 수 있다.
BMW가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디자인 때문이다. 수석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 밑에는 300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있다. BMW의 모토는 "BMW는 자동차가 아니라 패션"이라는 것이다. 그 패션은,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것처럼, 악마도 입는다.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력의 수준이 포화 상태에 이를 때, 그때부터 디자인은 곧 그 상품의 내용이 되어 버린다.
자동차들이 Ⅰ, Ⅱ 시리즈를 내거나 '뉴-' 라고 이름 붙여 신상품을 내는 것은 보기에, 껍데기만의 변화다. 그러나 사람들은 껍데기만의 변화라고 생각지 않는다. 디자인, 형식이 곧 내용이기 때문이다. 에어컨과 냉장고를 만드는 기술이 최고도에 달한 이후부터 그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디자인이다. 꽃 그림 하나를 얹어 놓아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가전상품 진열장에서 목격하고 있다. 형식이 곧 내용이고, 디자인이 상품의 질을 높이기 때문이다.
서체 하나, 글자의 간격 하나, 각 행의 넓이, 사진 한 장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결정적이다.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가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맨 먼저 청강한 것은 서체 디자인 강의였다고 한다. "나는 그때 서체의 미묘한 차이를 배웠다. 하나의 글자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글자들 사이의 여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그는 탁월한 디자인 감각을 길렀다. 그가 만든 매킨토시도, 쫓겨났다가 다시 애플 CEO로 복귀하게 된 것도, 또 전 세계인의 음악문화를 바꾼 아이팟도 그의 디자인 감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철학자는 "디자인은 근본적인 것과 연결돼 있다"고 자못 색다르게 디자인의 뜻을 풀었다. 그는 'design'이란 단어에서 de는 '풀어낸다'는 뜻이며, 'sign'은 신 혹은 자연의 숨은 신호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연 혹은 신의 숨겨진 신호를 풀어내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탁월한 디자인을 볼 때,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을 그대로 꺼낸 것이 내 조각이라고 한 것처럼, 자연의 숨은 조화를 보는 듯 감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국민소득 1인당 3만불의 시대, 이미지의 정치경제학이 말해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디자인이 곧 질이고,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것을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부장 theos@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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